찬란한 슬픔의 봄과 모란

찬란한 슬픔의 봄과 모란

중국이 원산지인 모란은 쟁반처럼 큼지막한 꽃이 아름다워 정원이나 화단에 관상수로 심습니다. 맞고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그림으로 많이 보셨을 겁니다. 화투 패에서 6월을 뜻하는 목단(牧丹)이 바로 모란입니다. 목단에서 변한 이름이 모란이고요.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 그림을 본 어린 선덕여왕(덕만공주)이 “이 꽃에서는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고, 아버지 진평왕이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하고 물으니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함께 보내온 석 되의 씨를 심었더니 정말로 그러해서 선덕여왕의 영민함에 모두가 탄복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선덕여왕의 슬기를 알게 하는 세 가지 일화인 지기삼사(知機三事) 중 첫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답니까? 모란에는 미약하지만 향기가 있어서 당연히 벌과 나비가 날아듭니다. 품종에 따라 진한 향기가 나는 것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매화의 향기를 암향(暗香), 난초의 향기를 유향(幽香), 모란의 향기를 이향(異香)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당나라의 위장(韋莊)이라는 이가 읊은 시에서도 모란의 향기를 칭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를 모를 리 없는 당태종이 보내온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선덕여왕이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분들에 따르면 모란 그림에는 원래 나비를 그려 넣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란은 부귀를 뜻하고 나비는 80세를 뜻하기 때문에 모란 그림에 나비 그림을 넣으면 80세까지만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되므로 넣지 않느니만 못 하다고 합니다. 즉, 영원히 부귀를 누리라는 의미에서 모란만 그리고 나비는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란의 씨를 심어서 키워봤더니 정말로 향기가 없더라 하는 말은 후세의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모란도 이야기 자체가 애초부터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기삼사(知機三事)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는 데다가 부모가 모두 성골인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한민족 역사상 첫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이지만 아버지의 사촌인 진지왕의 두 아들과 세 번이나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을 보지 못했습니다. 향기와 관계없이 기껏 날아든 벌과 나비가 하필 근친이고 자손도 없었으니 부귀는 누렸을지 몰라도 선덕여왕은 이래저래 복이 없는 꽃이었습니다.

모란을 비롯해 곤충에 의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꽃들은 대개 향기를 지녔습니다. 인간의 후각으로 맡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미약하나마 향기를 내는 편입니다. 일단 곤충의 눈에 멀리서도 잘 띄어야 하므로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고, 가급적 향기를 내어 꿀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다 많은 곤충이 찾아들고, 꽃가루받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바람에 의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꽃들은 곤충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곤충을 유혹할 필요도 없으므로 흰색과 같은 검소한 색과 최소한의 형식을 갖춘 꽃만을 피웁니다. 철저하게 경제성의 원리를 따르는 꽃의 세계에서 더 이상 치장과 준비는 낭비이자 에너지 소모일 뿐입니다.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에서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명 구절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생들로 하여금 역설적 표현이니 모순형용이니 하는 것을 배우게 했습니다. 시인의 관찰대로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리고 나면 찬란했던 봄은 다 갔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다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삼백 예순 날을 마냥 섭섭해 운다고 합니다.

출처: 풀꽃나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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