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숲은 다르게 말한다 – 독일 숲해설 현장을 가다 2

유럽의 숲은 다르게 말한다 – 독일 숲해설 현장을 가다 2

지난 협회지 봄 호에서는 볼레벤 숲아카데미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독일 시골동네까지 오는 여정과 그때의 감흥을 독자들과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제목에 낚여 글을 접하신 분들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처럼 클라이맥스에서 갑자기 툭 끝나버리는 한국 특유의 K-엔딩에 비유하며 후기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며 좋게 봐주시는 회원님들도 있어 한층 높아져 버린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지난 글 끄트머리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볼레벤 숲아카데미 프로그램 참가와 그 과정에서 느낀 한국과 독일의 숲해설의 차이를 숲해설가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면이 허락한다면 숲과 자연이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에피소드도 곁들여 보고자 한다. 볼레벤 숲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참가한 날이 2023년 5월 10일이니 이 글을 쓰는 오늘이 정확히 3년째 되는 날이다. 그때의 경험과 감흥은 비록 바랬을지 몰라도 기록해 둔 내용과 기억을 되짚어가며 그날의 현장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해 보고자 한다.

숲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의 하룻밤은 긴 여행으로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하지만 지난밤에 시작된 가랑비가 맘에 걸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어젖혔다. 구름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았다. 차질 없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리란 안도감과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식사 후 숲아카데미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정원을 가꾸다가도 처음 마주하는 이방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동네 사람들이 정겹게 느껴졌고, 우리나라 같으면 소가 있을 법한 장소에 말들이 놀고 있는 것도 이채로웠다.

숲아카데미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간 나와 메일을 주고받았던 안내데스크 직원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여러 곳에서 문의가 오는 중인지 컴퓨터 앞에서 헤드셋을 이용해 분주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1층은 리셉션 장소로 활용되는 것 같았다. 최근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책들이 쌓여 있었지만 잘 정리되고 깨끗해 보였다. 잠시 기다리니 오늘 숲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해 줄 가이드가 2층에서 내려왔다. Jonas라는 이름의 가이드는 지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로 특히 조류에 관한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과의 간략한 아이스브레이킹 후 오늘 프로그램을 위한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아카데미 내부 전경

숲으로 가는 길은 동네를 가로질러 난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천천히 걸으면서 Jonas는 길가 나무의 밑동과 지붕 위에 핀 지의류(Lichen)의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키가 제법 큰 “Linden Tree”(피나무)라는 나무 앞에서는 ‘독일 시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라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숲에서 자라는 동일 수종의 나무보다 키가 작은데 그 이유가 숲에서처럼 햇빛 쟁탈을 위해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나무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을 것 같냐?’는 질문과 함께 그 반경을 몸으로 그려 보이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이 나무의 뿌리는 포장도로 밑을 지나고 있다면서 자연 상태에서 크고 싶은 만큼은 자라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로 걷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사시나무(Aspen) 나무 앞에서는 나뭇잎이 왜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지 이유를 물었으나 내가 페터 책을 읽었다고 하니 아쉽게도 김이 새버렸는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Jonas는 사시나무의 잎이 팔랑거리는 이유가 더 많은 광합성을 위해 잎 양면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전문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또한 자작나무(Birch)나 버드나무(Willow)처럼 바람에 쉽게 날리는 씨앗을 가진 사시나무는 가급적 부모 품을 떠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특성이 있어 공동체보다는 홀로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반면 씨앗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너도밤나무(Beech)나 참나무(Oak)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땅 밑 뿌리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물과 영양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지의류(Lichen)
피나무(Linden Tree)
사시나무(Aspen)

숲 근처에 다다랐을 때 Jonas는 조류 전문가답게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으로도 어떤 종류의 새인지 맞혀 보였다. 딱따구리 소리에 독일에는 90여 종의 딱따구리가 있다면서 예전에는 새들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그 개체가 줄어들고 있어 생태계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찌르륵”하는 소리를 듣더니 휴대폰을 꺼내 영어 이름 “Chaffinch(푸른머리되새)”라는 새를 찾아 보이며 이 소리를 들으면 독일 사람들은 “비가 오려나 보다”라고 여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에 나는 “청개구리가 울면 비가 가까이 있다”는 한국의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Jonas는 이어 들판과 숲 경계에 있는 작은 원두막을 가리키며 사냥을 위해 지은 것으로 독일에는 노루(roe deer)가 많아 사냥이 중요한 토픽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개체수가 늘어난 야생 멧돼지 또한 한국과 독일에서 공통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음을 알아냈다.

숲 경계의 작은 원두막
푸른머리되새(Chaffinch)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어느덧 숲해설 프로그램 장소에 다다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과 숲을 서로 혼용하는 개념인 반면 독일에서는 완벽히 분리된 느낌이었다. 동네에서 시작해 들판으로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이내 숲속에 들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독일의 숲에는 한국에서 익숙한 오른다는 개념의 산은 제외된 것 같았다. 크게 보면 숲은 일상생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만큼 친근하게 다가왔다. 숲에 들어선 후 우리를 안내하던 Jonas는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곳에 멈춰 서며 본격적으로 숲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숲으로 이어진 길
숲해설 장소 초입

Jonas는 주위를 둘러봤을 때 보이는 큰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대뜸 물었다. 나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침엽수와 활엽수가 중간을 경계로 나뉘어 있다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또 다른 점으로 무엇이 있는지 재차 물었다. 의도 파악이 어려워 활엽수림에는 아주 작은 것부터 다양한 크기의 나무가 있지만 침엽수림에는 키 큰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있는 그대로 답했다. 그러자 이제 약간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침엽수림
활엽수림

침엽수림은 인공조림 후 관리하는 지역으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시베리아 등 북쪽 지역에서 들여온 가문비나무와 북미에서 들여온 더글라스퍼가 식재되어 있다고 한다. 식재된 지 약 5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침엽수는 향수병을 앓고 있으며 여름의 뜨거운 기온과 부족한 물로 인해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도 했다.

Jonas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가문비나무나 더글라스퍼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병을 이기는 힘이 약해져 송진을 만들어 내지 못하거나 피톤치드와 같은 향을 발산하는 능력도 떨어진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무좀벌레(Bark Beetles)는 이내 알아차리고 그런 나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공격을 받은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재선충에 걸린 나무를 처리하는 것처럼 모두 깨끗하게 벌목해야 한다고 하며 더욱이 지구 온난화로 인해 고향으로부터 먼 이곳 독일의 침엽수림은 큰 문제라고 한다. 피톤치드에 관한 얘기 중 내가 한국은 침엽수림에서 산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Jonas는 독일에서도 최근 들어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반대편의 활엽수림은 25~30년 정도 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천연림으로 볼레벤 숲아카데미에서 원시림 프로젝트(primeval project)의 일환으로 향후 50년간 자연 상태로 보전하는 지역이라고 했다. 원시림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의 숲을 1제곱미터부터 일정 구역을 저렴한 가격(현재 3.65유로)에 구매할 수 있으며 아카데미는 산주와의 협약을 통해 숲을 향후 50년간 자연 상태로 보전한다는 것이다. 즉, 구매자는 자신만의 숲과 자연보호에 동참할 수 있으며 산주에게는 그 수익금으로 벌목으로 인한 소득 손실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젝트에 동참한 구매자에게는 산림 전문가와 동반해서 원시림보호구역을 무료로 투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듣고 나니 원시림으로 보호하려는 진심이 느껴졌고 이런 형태는 산주, 숲 애호가, 자연보호와 지구 온난화 극복 등 여러 측면에서 모두에게 좋은 아이디어로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프로젝트를 시도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활엽수림은 천연림으로 보호되고 있어 그런지 아주 어린나무에서부터 큰나무까지 한눈에 봐도 숲이 건강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가 반대편 침엽수와 달리 여기 나무들은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Jonas는 웃으면서 나무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면서 우리가 소통하듯 나무들도 소통 수단으로 향기 또는 뿌리를 통해 화학성분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양탄자처럼 낙엽으로 두껍게 쌓인 활엽수림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Jonas는 어린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낙엽으로 덮인 아주 어린 참나무(Oak) 묘목을 찾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숲을 걷는 동안 나는 한국과 다른 이국적 풍광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희귀한 너도밤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전봇대처럼 쭉쭉 뻗어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활엽수처럼 구불구불한 모습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두 팔로도 감쌀 수 없을 만큼 굵은 나무는 150년 정도 된다고 했다. 또한 커다란 어머니 나무(Mother Tree) 바로 아래서 자라고 있는 어린나무를 찾아 보여주며 싹튼 지 2주 정도 됐고 뿌리가 좀 더 발달하면 어머니 나무의 뿌리와 서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렇게 뿌리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어머니 나무는 광합성으로 만든 당분(Sugar)과 미네랄을 어린 자식 나무에 제공하며 보살핌을 시작한다고 한다.

울창한 너도밤나무 군락
너도 밤나무 새싹과 균류

큰 나무 아래의 어린나무들은 위에서 투과되는 3% 정도의 햇빛만으로는 잘 자랄 수 없어 어머니 나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 가족에 비유하며 엄마가 자식들에게 음식을 해주고 보살피듯이 같은 상황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고도 했다.

Jonas는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을 보여주겠다며 두껍게 쌓인 낙엽을 조심스럽게 들추더니 하얗게 생긴 것을 찾아 보이며 나무들의 뿌리 네트워크는 이렇게 생긴 균류(fungi)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고 했다. 심지어 서로 다른 수종의 뿌리와도 연결된다고 했다. 내가 소셜 네트워크 같다고 하니 Jonas는 맞는다면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페터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몸소 체험하고 가이드 Jonas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이보다 유익한 숲해설이 있을까 싶었다. 또한 숲해설 측면에서 보자면 특정 나무를 주제로 한 지식이나 스토리텔링도 좋겠지만 숲속 생태계라는 특별한 사회를 주제로 이끌어 내고 사람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러기 위해서는 개별 나무 지식뿐만 아니라 숲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무의 역할과 이들 간의 관계도 공부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어머니 나무 아래서 모여 자라는 어린나무들을 두고 나무 학교에 비유하며 어떻게 큰 나무로 성장해 가는지, 나무 위에 집을 짓는 새들은 어떻게 위험을 감지하는지, 너도밤나무나 참나무의 가지는 깔때기 모양으로 자라지만 더글라스퍼나 가문비나무는 왜 그 반대인지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재미있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숲해설 프로그램이 마무리되어 가면서 숲을 돌아 나오는 길에 Jonas는 나에게 특별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던 길에서 벗어났다. 안내하는 곳으로 가까이 가보니 거기에는 돌덩이처럼 생긴 제법 큰 그루터기가 있었다. 밑동이 잘려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는 죽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그루터기
그루터기 이웃의 더글라스퍼

이 그루터기가 책 『The Hidden Life of Trees』 첫 장에 나오는 페터가 돌덩이인 줄 알았다던 그 나무인가 싶었는데, Jonas는 그 나무는 너도밤나무이고 이 나무는 “더글라스퍼”라고 했다. 비록 다른 나무지만 페터의 말처럼 분명 살아 있었고 그루터기만으로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므로 주위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Jonas는 주위 다른 나무들이 뿌리 네트워크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으며 그루터기 윗부분은 수피가 자라면서 서서히 닫히는 중이라고 했다. 유대가 강한 사회처럼 위험에 처한 나무가 생기면 주위의 공동체가 발 벗고 나서 도와주는 것 같았다.

숲을 나와 다시 볼레벤 숲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에 숲을 등지고 바라본 동네의 모습은 고즈넉하고 전형적인 목가적 풍광이었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만들어 냈다기보다 숲이 빚어낸 작품으로 표현하는 맞을 것 같았다. 이제 프로그램을 시작할 즈음에 들었던 긴장감도 풀어지고 시골 동네의 아름다움에 젖어 그런지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흰색 꽃이 한창이던 가시칠엽수를 흔하게 지나쳤던 것 같았다. 숲아카데미 근처 교차로 옆에도 제법 큰 나무가 보여 Jonas에 물어보니 “Horse Chestnut”이라고 하면서 독일 고유의 수종은 아니라고 했다. 마로니에로 알고 있던 터라 당황스러웠지만 인터넷 찬스를 이용해 보니 가시칠엽수를 나타내는 영어 표현임을 알게 됐다.

목가적 동네 풍경
가시칠엽수(Horse Chestnut)

볼레벤 숲아카데미로 되돌아 왔을 때 Jonas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길래 같이 찍자고 하니, 그러면 동료를 부를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Jonas는 뜻밖의 사람과 같이 나타났다. 페터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놀라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먼저 간단한 인사부터 건넸다. 페터도 책 출판이 있어 캐나다와 미국을 들러 우리와 같은 날 독일로 들어왔다면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지만 운 좋게 여기서 만난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사진을 찍은 뒤 다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잠깐의 담소를 나누었고 혹시나 해서 가져갔었던 책에 사인까지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책에 붙여 두었던 포스트잇 메모를 읽는 페터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책 한 권의 내용이 발단되어 멀리 독일까지 찾아와 몸소 숲해설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운 좋게도 그렇게 기대했던 페터까지 직접 만나는 일정으로 마무리되다 보니 이보다 좋은 경험과 감동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기념 촬영(Peter & Jonas)
페터의 친필 사인

오후는 볼레벤 숲아가데미에서 그리 멀지 않은 Eifel 국립공원을 트레킹 하는 일정으로 계획을 세웠다. 차를 몰아 국립공원 도착 후 안내센터에서 3시간 정도의 코스를 추천받은 다음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한국에 비하면 숲으로 이어지는 이곳 독일의 트레킹 길은 평탄하고 돌부리가 거의 없어 걷기에는 전혀 힘들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뭇잎을 피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숲길을 걸으며 아들에게 오전 숲해설이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았다.

개울을 건너고 약간 오르막으로 이어진 길을 말없이 걸으며 어디쯤 왔을까 궁금하던 그때 영화 장면 바뀌듯 느닷없이 숲이 끝나더니 바로 앞에서 드넓은 초지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모두 놀라 함성을 지르면서 얼어붙은 것처럼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광활한 풍광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옆에 있던 두 아들도 그랬는지 한참을 감상하다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바빴다. 그림에서나 있을 법한 풍광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넓은 초지 사이로 길게 이어진 들길을 두 아들과 단 셋이 걷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느닷없이 마주한 광활한 초지
초지 사이로 이어진 들길

그때 두 아들은 모두가 수긍하는 중2병이었으니 마음의 거리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근데 평소 같으면 비위를 건드리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피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마음의 얘기를 터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내가 더 감동스러웠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평소와는 몇배 이상 더 끈끈한 부자 관계로 발전하는 느낌이었다. 누가 어떻게 하지 않았음에도 부자지간 놓여 있던 마음의 벽이 단숨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 자연이란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이어주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두 아들 또한 그날의 놀라운 경험이 뇌리 한편에 각인되어 평생 남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볼레벤 숲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참가하면서 그때의 체험과 단상, 그리고 자연이 주는 힘을 짧게라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아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었던 에피소드까지 이어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막연한 기대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기대 이상 많은 것을 얻었고 그 중 숲해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체득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 할 수 있을 것같다. 앞으로 독일의 경우처럼 몸소 경험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숲과 사람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지구촌 이야기를 찾아 협회지에 이어가 보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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